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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강서연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지독한 고요함이었다.
교외의 새소리처럼 평화로운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뉴욕의 소란함을 무성 영화로 만들어 버리는 삼중창 너머, 70층 높이에서나 느낄 수 있는 무겁고 숨 막히는 정적.
두 번째로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두개골 아래에서부터 심장 박동에 맞춰 쿵쿵 울리는 둔탁한 통증. 눈을 뜨려 했지만,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마저 날카로운 공격처럼 느껴졌다. 끙,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는 순간, 그녀는 두 가지 끔찍한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첫째, 맨살에 닿는 시트의 감촉이 집에서 쓰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부드러운 이집트산 면이라는 것.
둘째,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숙취의 안개가 걷히자, 얼음장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공포가 심장을 꿰뚫었다. 강서연은 숨을 죽인 채 미동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알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왼쪽에 남자가 자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든 남자는 시트가 허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한 등과 긴장감 넘치는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넓은 어깨는 잘록한 허리로 이어졌고, 잠든 와중에도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보였다. 오른쪽 견갑골에는 날카롭고 하얀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그는 남편, 강준혁이 아니었다.
강준혁은 부드러운 손과 매끈한 등을 가졌다. 하지만 이 남자는 모든 것을 단숨에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지난밤의 기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선 갈라 파티. 미세한 쇠 맛이 나던 샴페인. 무도회장이 빙글빙글 돌던 갑작스러운 현기증. 누군가 팔꿈치를 붙잡던 단단한 손길. 나직한 목소리. 차를 타고 이동한 후의… 뜨거운 열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심이 시큼하고 무거운 덩어리가 되어 위를 짓눌렀다. 외도였다. 3년간 사랑도 섹스도 없던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해주던 유일한 규칙을, 그녀는 마침내 어기고 말았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
강서연은 이불 아래로 조심스럽게 다리를 뺐다. 모든 움직임이 몇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옷깃 스치는 소리마저 이 고요한 방에서는 총성처럼 들릴 것 같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발, 그리고 다른 한 발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디뎠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찾아 헤맸다. 지독히도 싫어했던 은색 실크 드레스는 문 근처에 구겨져 있었고, 하이힐은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서둘러 옷을 입으려 했지만, 떨리는 손가락은 지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지퍼가 고장 나 있었다. 이 상황에 고장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클러치에서 옷핀을 찾아 겨우 옷을 여몄다. 날카로운 핀이 살을 찔렀다. 차라리 잘됐다. 그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가 깨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의 눈을 마주하고, 그 시선 속에서 어떤 거래의 의미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때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메모지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써야 할까. 사과? 아니면 작별 인사?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양각으로 새겨진 레터헤드에 박혔다. 스털링 플라자.
강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스털링.
남편의 가문 이름. 그녀의 혼인 증명서에 적힌 바로 그 이름이었다.
잠든 남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공포가 목을 조여왔다. 설마? 사촌? 유럽에서 온 먼 친척? 가문이 넓다지만, 주요 인물들은 모두 안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다시 자세히 뜯어보았다. 흉터. 거대한 체격. 그는 강준혁의 파티에서 만났던 부드럽고 응석받이 같은 남자들과는 종족부터가 달라 보였다. 위험해 보였다.
'우연일지도 몰라.'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설득했다. '여긴 그냥 가문 소유의 호텔이고, 저 남자는 단순한 투숙객일 뿐이야.'
하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만약 이 남자가 강준혁을 안다면… 만약 그가 자신을 알아본다면…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확인하려던 순간, 열려 있는 지갑이 보였다. 그 안에는 은색 머니클립에 꽂힌 빳빳한 100달러 지폐 다발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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